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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장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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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초정은 현재 경상북도 지방문화재 제46호로서 부호군 이정복이 1625년(인조3년)에 처음 세웠으며, 1689년(숙종 15년)에 훼손 된 것을 송제 이 해(정복의 손자)가 중건하여 중건 기문을 지어 남겼고, 1727년(영조3년)에 중수하였으나, 이듬해 병란으로 일부 화재를 입은 뒤 1736년 미증유(未曾有)의 대홍수로 유실된 것을 1788년(정조 11년)에 경호 이 의조가 현재 위치에 삼중건(三重建)하고 중건기문을 남겼으며 진암 이수호가 상량문을 지어 칭송하였다.
건물의 구조는 아래층은 굵은 잡목 기둥을 높게 뽑아 올렸고 이층에는 마루이며 가운데에 방을 넣고 가에는 난간이 둘러 있다. 이와 같은 누각의 형태는 보통 방이 양쪽 끝에 있는 것과 대조가 된다. 또 앞에는 연못을 조경해 놓았는데 가운데 섬을 돌로 배치해 놓은 것 등 옛 조선조의 조경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이 방초정에다 당대의 유명한 문장가, 묵객들이 많이 다녀 갔고 그들의 시와 글이 많이 남아 있다. 현판글씨는 김 대만의 작품이다.

구성초등학교 뒤 산골짜기에 명성재가 있는데, 3간 재실 가운데 마루에 유리창문으로 칸막이를 하고 상자를 짜서 보존되어 왔었다.
1974년 12월 경상북도 지방문화재 제67호로 지정되어 1996년 도비와 시비 지원으로 구성초등학교 교문동쪽 목조건물 숭례각을 건립하여 현재 보존하고 있다.
이 판목은 1792년에 직지사의 거목으로 공인 김 풍해의 지휘로 3년 걸려 가로 46cm, 세로 55cm의 목판 475장의 양면 54면에 한문 글씨를 새긴 것이다. 이에 보관된 판목에는 가례증해와 소학증해 두 가지가 있다.
가례증해는 이 의조가 주자 4대 예서(四大禮書)의 하나인 즉 관혼상제에 관한 예서를 해설하고 자기의 학설을 보완한 것으로 1771년에 기초하여 모두 10권으로 1792년에 완성했다.
소학증해 판목은 이 의조의 4종질되는 이 수호가 소학을 해설하고 사견을 부쳐 저술한 것으로 가례증해와 함께 각목한 것으로 241매의 판목 양면에 새겨진 것이다. 이 의조는 본관이 연안이고 1727년에 태어나 벼슬길을 멀리하고 오로지 학문에만 정전하여 후진을 양성하고, 저서로 『의요보유(義要補遺)』,『경의수차(經義隨箚)』등을 남겼다.

중종과 명신들의 초상화를 그려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된 이 상좌의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가로 2m, 세로 1m 크기의 비단에 교위에 앉은 사모관대의 관복차림의 채색 초상화로 400년이 지나는 동안 좀먹고 퇴색이 심하여 오손되고 있다.
이 초상화는 명종 때 이 숭원에게 내린 충간(忠簡)이란 시호와 함께 내린 하사품이라고 한다. 이숭원은 본관이 연안이고, 1428년에 나서 문관에 합격하여 벼슬이 병조판서에 이르고, 순성명량 좌리공신(純誠明亮佐理功臣)이 되고 연원군(延原君)에 봉록(封錄)되었다. 64세로 죽으니 청백리로 천록된 위인이다. 문장과 도덕이 뛰어나고 이도(吏道)에 어긋남이 없어 죽은 뒤에 시호와 영정이 하사된 것이다.
영정을 경덕사에 모시고 후손들이 이곳에서 제사드린다. 1974년에 지방 유형 문화재 제69호로 지정되어 경덕사가 서 있는 대지 321평과 경덕사 건물 20평이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연안이씨 문중에서 보호하고 있다.
승유재는 구성면 상거리 김녕인, 김숙련을 위하여 1849년(헌종 15년)에 후손 치규, 치일이 집안과 더불어 몹시 슬퍼고 애닳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재실을 짓고 해마다 시월 천사때에는 이곳에서 제지내고 일문의 후손으로 하여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익히니 조상을 섬기는 일과 자신의 생업을 소홀히 하지 않더라. 단옹 이공이 상량문을 짓고 연재 송병선이 현판을 지어쓰고 심석 송병순이 기문을 지었다.

모성정 정자의 뒷쪽에 산더미 같은 큰 바위가 에돌아 이리 저리 굽은 형상이 장엄하고 뒤로는 모성산의 푸른 정기가 서려고, 앞으로는 푸른 시내가 끼고 흘러 맑은 호수 깊은 못을 이루고, 고기떼가 어울려 헤엄치며 좌우로 작은 바위들이 늘려있어 크고 작은 섬들을 이루고 있으며, 물결처럼 보이는 자욱한 연기, 소나무 사이로 비치는 달빛과 낮게 드리운 저녁놀, 나가지 흔드는 솔바람은 이 정자와 어울리는 네 가지 풍경이다.
연안 이씨 초당 장원(1560 - 1649)이 글을 외우고, 목욕하고, 바람을 쐬면서 거닐던 곳이었다. 『투간욕작강호객, 환파문왕재후거: 시골의 자연에 묻혀사는 선비들이 낚시대를 던지고자 하고, 문왕이 수레에 실려 돌아오기를 싫어하도다 』와 『사무충효외 허로굴암변: 충효 밖에 할일이 없으니 굴암변에서 한일이 헛되이 늙었도다』와 같은 글은 선생이 남긴 시의 일부이다. 선생의 장손인 회산 이진영이 1679년에 굴암을 모성암이라 고쳐 부르고 친필로 그 바위에 크게 써서 새겼고 후손인 학산 이현기가 1929년 초당 이선생 장구지소라는 아홉자와 경앙대 등을 주위 암석에 새겼으며 또 후손이 합력하여 이바위 앞에 내칠외오포로 모성정을 세워 선생이 남긴 부탁을 빛나게 하였다.
이 산수의 경치는 이 고을의 이름난 곳으로 오래전부터 전해오고 있다.
※참고문헌 : 초당실기, 계헌집, 학산집, 읍지

2000년 9월 4일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388호로 지정되었다. 일제강점기에 김천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한 여환옥(呂煥玉:896∼~963)의 생가이다. 성산여씨 12세손인 여명주(呂命周:1681∼?)가 18세기 초에 지었다고 하며, 건립 당시에는 60여 규모의 저택이었으나 일부가 1870년 농민항쟁 때 방화로 불에 타고 1936년 수해 때 붕괴되어 현재는 정침(正寢)과 사당·대문채만 남아 있다. 이 중 대문채는 벽체가 없어져 헛간으로 쓰이고 있다.
대문채 오른쪽 안쪽에 있는 정침은 정면 7칸, 측면 8칸의 ㄷ자형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6칸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 2칸짜리 상방과 오른쪽에 1칸짜리 안방이 있다. 상방 앞쪽으로는 부엌·방·고방·마루방·마루가 이어져 좌익사(左翼舍)를 이루고, 안방 앞쪽으로는 작은방·부엌·고방·사랑방·누마루가 이어져 우익사(右翼舍)를 이룬다.
가구는 5량가(五樑架)이며, 안채의 종도리 사이에 특이하게도 우물반자를 설치하였다. 한편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정침 오른쪽 뒤에 별도의 공간을 이루며 주위에 네모난 토석담장을 둘렀다. 여환옥의 손자인 여만종이 소유 관리하고 있다.

주향은 연안 이씨 충간공 이숭원이고 1788년에 정양공 이숙기, 문희공 이호민을 배향하고 다시 1794년에 문장공 이숙함, 문천공이후백을 추향했다. 1870년 (고종 7년)에 훼철되었는데 1918년에 그 자리에 강당을 건립하고 명례당이라 현액했다.
충간공 이숭원은 1453년(단종 1년)에 증광문과에 장원하여 여러관직을 거쳐 1491년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정양공 이숙기는 453년(단종 1년)에 무과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호조판서에 이르렀다. 문희공 이호민은 이숙기의 증손으로 1579년 진사, 1584년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1592년 임란때 이조좌랑으로 의주에 왕을 호종, 그 뒤 여러 관직을 거쳐 예조판서, 좌찬서에 이르렀다. 문장공 이숙함은 1454년(단종 2년)에 증광문과에 급제하고 1457년(세조 3년)에 문과 증시에 급제하여 사가독서를 하고 여러관직을 거쳐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문청공 이후백은 16세 때 향시에 수석으로 합격 1546년 사마시를 거쳐 1555년 식년 문과에 급제 1563년 사가독서를 했으며 여러 관직을 거쳐 양관 대제학을 지내고 호조판서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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